박누가 선교사의 삶,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다
최근 유투브를 통해 접한 한 선교사의 삶에 숙연해 졌습니다. '살면 필리핀 죽으면 천국'이라며 살아있는 날 모두를 바쳐 필리핀 오지의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했던 선교사 박누가(본명 박병출)의 생의 기록을 보며 한없는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울지마 톤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던 고(故)이태석 신부, 그리고 박누가 선교사 등... 세상에는 현재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며 '자신을 더 사랑하라, 인생을 즐겨라'는 YOLO 풍조가 넘쳐나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의인들이 있습니다.
위암 항암치료를 위해 잠시 귀국했던 그는, 치료를 받자마자 선교지 필리핀을 향한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간단한 진료, 의약품 공급만 받아도 살 수 있지만 가난이라는 멍에를 메고 있기에 죽어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외면할 수 없어서, 시한부 선고의 아픈 몸을 이끌고 30년을 사랑하고 섬겼던 그 곳으로 다시 향하는 그 모습을 보며 감동받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청년 시절의 그는 우연히 필리핀 의료봉사를 다녀오고 난 뒤, 약 딱 한알이면 고칠 수있을 텐데 많은 사람들이 그게 없어서 죽어간다며... 의료 선교를 떠났습니다. 바기오 북부 산악지대. 그가 선택했던 선교지였습니다.
1989년 선교를 시작한 이후 30년을 의술이며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부어 주고 갔던 그는 한평생 주머니에 큰 돈을 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적은 돈이 생기면 빵을 사서 배고픈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의약품을 살만큼의 넉넉한 돈이 들어오면 약품을 사서 진료를 하기위해 오지를 방문했다지요.
열악한 환경탓에 그는 뎅기열, 장티푸스, 콜레라 등 1종 전염병을 비롯한 각종 전염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외과 의사로서 보장된 삶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한 그에게 그런 질병의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는 변변한 의료장비나 의사 동료 하나 없이, 청진기 하나만을 가지고 현지에서 사역을 하며 그들의 병을 낫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가 그러한 질병에 겪어야만 그 모든 증상을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기에, 그런 질고를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깨달음을 얻고 오히려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1994년 췌장암과 2004년 위암을 비롯 이후 간경화와 당뇨의 질병을 얻었고 기적처럼 치유를 받았지만, 2018년 8월 향년 58세로 소천하기 약 2년 전. 2016년에는 위암이 재발하는 등 수많은 병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픈만큼 사랑하고, 아니 아플수록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박누가 선교사의 기도에서)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나 시련을 이처럼 긍정하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원망하고 불평할 법도 한데, 내가 아파보니 아픈 사람의 고통, 그리고 그 아픈채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절망이 더 크게 보였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고통 속에서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보듬고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은 그의 생의 태도에 경의가 표해집니다.
의료 사각지인 오지에 살고 있는 병자들을 방문하기위해 버스를 개조한 차를 직접 끌고 다니던 박누가 선교사님은 열악한 환경탓에 코브라에 물리거나 때로는 강도에게 칼을 맞기도 하는 등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만나지만 그때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또 그분께서 지금도 우리의 삶을 돕고 보호하신 다는 것을 믿는 필자이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경험하고 또 들을 때 마다 매번 새롭게 놀라게 됩니다.
한번은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하는데 그날따라 택시도 안 잡혔고 공항 1km를 앞두고 차가 두번이나 퍼져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그와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선교팀은 5분 차이로 한국행 비행기를 놓쳐버렸고, 선교팀의 귀국이 늦어지게 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과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해서 먹을 것을 대접하고 함께 나눠 먹고 TV를 켰을 때 이들은 놀라운 뉴스를 접합니다. 그들이 타려고 티켓을 끊었던 비행기의 추락사 사고 소식이었습니다.
이 분의 인생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주의종의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도 떨어져 살아야 했고 두 아들은 한국에서 떨어져 성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철저히 가족을 외면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런 그를 아내는 마음으로 응원했고 이해했습니다.
말기 위암 환자로 극한의 고통속에서도 박누가 선교사님은 필리핀 오지의 소외받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숨이 붙어 있는한,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움직일 힘이 있는한 그는 아픈몸을 움켜잡고 그들을 찾았습니다. 차로 이동할 수 없는 오지로 베낭을 메고 구름다리를 건너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길, 그러나 자신의 삶을 비관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허락된 마지막 시간동안 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전해주고 한번이라도 더 하나님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구원을 전했습니다.
박누가 선교사님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극한의 고통조차 주님을 위한 사역에 사용했던 선교사님은 인생의 모든 목표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맞추었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안위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누가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의사였지만 주님이 그를 제자로 부르신 이후 사복음서 중 하나인 누가복음을 저술했습니다. 의사 특유의 세밀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을 잘 녹여내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한 누가복음의 저자처럼 되려고 선교사님은 자신의 별칭을 박누가로 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어쩌면 12사도처럼 아니 그들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했을지 모릅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그의 삶은 천국에서 빛날 것입니다.
소천하시기 마지막 2년 동안에도 남은 삶을 최선을 다해 선교지를 섬겼던 선교사님의 삶은 인간극장 아픈만큼 사랑한다와 그 후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선교지였던 필리핀 누가병원은 동역자인 처조카 김주희 간호사가 그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